7월 초에 JLPT 1급(일본어 능력시험)을 처음으로 일본에서 봤다는 글을 올린 적이 있다(링크).

그리고 2개월 만에 정식으로 성적이 나왔다.

그 성적은!

정말 자신있게 본 시험이었고, 예상대로 결과가 나왔다.

무엇보다 전에 봤던 시험과 비교하여 점수가 떨어지지 않아서 만족스러웠다.

앞으로도 이것저것 열심히 해봐야지.

일단은 영어가 시급하다!

나의 고등학교 시절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기숙사. 나는 3년 중 2년하고도 한 학기를 기숙사에서 보냈다. 우리학교 기숙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조건이 필요했는데, 그것은 바로 전교 20등에 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기숙사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나는 전교 20등 안에 들지 못했다. 영어에는 자신이 있어서 점수에 상관없이 곧 잘 전교 1등을 하곤 했었지만, 수학 점수가 항상 뒤로부터 전교 5등 안팎이어서 총점은 기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공부에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대로 시간이 흘러갔다면 지금쯤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하여튼 1학년 2학기가 시작될 즈음, 나는 집안 사정으로 인하여 전주로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1학년 당시 담임선생님께서 나를 교무실로 불러내어 조용히 말씀하셨다,

 

기숙사에 들어가지 않을테냐?”

 

아마 나의 영어 성적이 아까운 마음이 들으셔서 였을테지만, 나는 그 때를 기억해낼 때마다 아직까지도 그때 느꼈던 신비로운 느낌을 느낄 수 있다. 내가 그런 일종의 엘리트 집단에 들어가게 될 수 있다니......

 

 

그때까지 나에게 우리학교 기숙사생은 매우 특별한 존재처럼 여겨졌었다. 학기 초부터 그들이 부러웠던 것은 그들이 일종의 동료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군산 시내의 유명 학원들에 다니고 있었고, 그곳에서도 일종의 엘리트 반에 속해있던 아이들이었던 것이다. 같은 학원에서 알게 된 경우도 있었지만, 다른 학원임에도 불구하고 성적이 높은 아이들의 부모님들끼리 커뮤니티 같은 것이 형성되어 있어서 그전부터 교류가 있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중학교 때 인문계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 허겁지겁 학원에 다녀서 모자란 연합고사 점수만을 대충 메워서 고등학교에 진학한 나에게는 그들의 세계가 내가 있는 레벨보다는 그 이상의 것으로 보였다. 부럽기도 했지만, 이질감과 동시에 괴리감을 지울 수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일단 그들이 나보다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생각했다. ‘나와 저들의 차이가 무엇일까? 무엇이 저들을 저런 엘리트로 만든걸까?’ 정답은 간단했다. 기숙사생들만 점심시간에 긴 줄을 서지 않고 밥을 별도의 공간에서 먹을 수 있는 것도, 가끔씩 선생님들이 불러내어 돌아왔을 때 품 한가득 새 문제집을 안고 돌아오는 것도, 정규 수업 시간에 자거나 다른 공부를 해도 그다지 꾸중 듣지 않는 것도 전부 성적때문이었다. 결코 그들이 인간적으로 뛰어난 품성을 지녔거나(물론 그렇지 않다는 것도 아니지만) 남들 모르는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아이들은 기숙사 밖에 더 많았다. 그들은 언어, 수리, 외국어, 사회탐구, 과학탐구에 우수했기 때문에 남들과 다른 특별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어쨌든 나는 이제껏 자라오며 겪었던 빈번한 이사에 지쳐있었고, 홀로 군산에 남아있기로 결정을 했다. 이제 이들과 한 배를 타게 된 것이었다.

 

 

기숙사에서 만나게 된 아이들은 역시 뭐가 달라도 달랐다. 학원이나 과외는 기본이고 그때까지 나는 알지도 못했던 인강이라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것은 인터넷 강의의 준말이었는데, 그들은 PDA는 물론 노트북 같은 것을 사들고 와서는 자율학습시간 동안 그것을 보곤 했던 것이다. 나는 그 중 한명에게 학교에도 같은 과목을 가르쳐주는 선생님이 계신데 왜 그런 것을 보고 있냐는 질문을 했다. 당연한 대답이었겠지만, 그는 더 잘 가르쳐준다. 알기 쉽다. 수능에 나온다.’ 같은 대답들을 했다. ‘수능에 나온다......’ 그랬다. 우리들이 일요일을 제외하고 아침 640분에 일어나 20분 동안 운동을 하고 720분까지 열람실로 내려가 830분까지 자율학습을 하고, 학생식당에서 식사를 한 뒤, 9시까지 교실에 가서 정규 수업을 받은 뒤 18시에 정규 수업이 끝나면 저녁식사를 하고 19시부터 22시까지 정해진 교실에 가서 특별수업을 받아야 하는 것은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 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깨달음 때문에 왜 좋은 대학에 가야하는 것인가에 대해서 머리가 깨질 정도로 생각에 잠기고 말았다.


 

어째서 이렇게 공부해서까지 이들은 좋은 대학교에 가고 싶어 하는 것인가?”

 

 

물론 나라고 좋은 대학교에 가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그러한 열망은 기숙사에 들어가 열람실 한구석에 처박혀서 열심히 공부하다보니 어느새 내 사고방식 속에 거미줄처럼 끈끈히 얽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내가 지적인 갈증에 목말라있어서, 대학교에 들어가서 그러한 지식의 갈증을 해소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고등학교의 모든 교육과정이 대학을 향해있었고 대학 이외의 길을 생각할 여유나 대안 같은 것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학은 당연히 가야하는 것이고 그 외의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너무나도 소수이기 때문에 알아서 생각해야 한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열망은 커져갔지만, 여전히 어째서 그래야하는지에 대한 답은 내릴 수 없었다. 옛말에 세월은 화살과 같다고 했던가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대학에 대한 각종 의문을 품고 있었던 나였지만, 지금은 그런 나조차도 이젠 대학 3학년생이 되어있었다.

 

 

그 당시 기숙사생이었던 우리들끼리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우등생들끼리 라이벌의식으로 가득해서 서로를 죽도록 미워한다거나 비방한다거나 만년 2등이 1등을 옥상으로 불러내 등을 떠민다던가 하는 건 전혀 없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본받을 점이 많은 좋은 친구들이었다. 지금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친구의 대부분은 그때 만난 친구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 되돌이켜 보면 우리가 서로의 미래에 대해 질문 했던 것은 너 어디 갈거냐?” 뿐이었던 것 같다. 아주 구체적으로 물어봐도 결국 너는 어디 무슨 과가 목표냐?” 정도였다. 서로 나중에 무엇이 되고 싶은 것인 가에 대해서는 질문한 적이 전혀 없었던 것 같다. 법대에 가고 싶다고 하면 당연히 판검사가 되는 것이었고 신방과에 간다고 하면 당연히 아나운서나 기자가 되는 줄 알았다. 물론 나의 경우도 교육학과에 가게 되면 당연히 교사가 되는 줄 알았다. 나는 덤으로 예쁜 여교사와의 결혼까지도 꿈꾸었으니 매우 착각이 심한 편에 속했었다. 하지만 정작 대학에 들어가고 나니 뭔가 이상했다. 고등학교 때 그렇게 죽도록 노력했는데도 그 결실을 이룬 5년이 지난 지금은 그때보다 더 죽도록 노력해야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세상이 되어있었다.

 

 

뭔가 이상하다. 대체 이놈의 경쟁이라는 것은 언제쯤 끝나게 되는 것일까. 지금은 심지어 혹여나 내가 나중에 노인정에 들어가게 될 때도 입정시험이라는 것을 쳐서 명문노인정에 들어가기 위한 시험을 봐야하는 것은 아닐까하고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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